타이타닉에 탔던 두 올림피언의 이야기

1912년, 미국으로 향하는 첫 항해에서 침몰한 화이트스타의 ‘타이타닉’호. (Photo by Topical Press Agency/Getty Images)
1912년, 미국으로 향하는 첫 항해에서 침몰한 화이트스타의 ‘타이타닉’호. (Photo by Topical Press Agency/Getty Images)

올림픽 역사는 수많은 챔피언과 신기록, 그리고 멋진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기묘한 일이나 재미있는 일화, 감동적인 이야기와 슬픈 기억도 놀라울 정도로 많이 존재하죠. 저희는 매주 과거의 올림픽 이야기를 발굴해 내는 시간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선사해 드리려 합니다. 이번 주는: 타이타닉 생존자인 두 명의 올림피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배경

1912년은 역사상 최악의 해난 사고 중 하나인 RSM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가 있었던 해입니다.

타이타닉호의 침몰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여객선, 빙산, 침몰하는 배, 현악 4중주…그리고 승선한 2,208명 중 약 3분의 2에 해당하는 1,496명이 사망했습니다.

우연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는 1912년 4월 15일, 제 5회 올림픽이 스톡홀름에서 개최되기 약 한 달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타이타닉은 ‘올림픽’급 여객선 세 척 중 두 번째 배였습니다.

하지만, 타이타닉 사고와 올림픽의 연결고리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사고 당시 타이타닉에는 두 명의 올림피언이 타고 있었습니다. 끔찍한 사고와 죽을 뻔 한 위기를 겪으며 정 반대의 이야기를 써내려간 두 명의 올림피언. 바로 리처드 노리스 윌리엄스와 코스모 더프 고든입니다.

리처드 노리스 윌리엄스의 이야기

당시 21세로 테니스 선수였던 노리스 윌리엄스는 아버지, 찰스 듀안 윌리엄스와 함께 타이타닉에 올랐고, 고향 미국으로 돌아가 US 오픈 우승을 거두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1등석 승객이었던 노리스 윌리엄스와 그의 아버지는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지만, 바로 그 날 타이타닉의 침몰과 함께 테니스 스타의 꿈에 위기가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타이타닉이 침몰하기 시작한 상황에서도 노리스 윌리엄스와 아버지는 끝까지 배에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배가 물속으로 더 가라앉기 시작하자 두 사람도 결국 배를 벗어나기로 결정합니다.

노리스 윌리엄스의 아버지는 바다로 뛰어드는 과정에서 배의 구조물에 부딪히며 탈출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노리스 윌리엄스 본인은 바다로 무사히 뛰어들었고, 어는 듯 한 물속에서 구명 조끼에 의존한 채 여섯 시간을 떠 있었습니다.

바다로 뛰어들기 전, 타이타닉이 침몰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노리스 윌리엄스와 그의 아버지는 구명 조끼를 다른 승객들에게 양보했고, 특히 노리스 윌리엄스는 문을 부수고 안에 갇힌 승객을 구해내기도 했습니다.

사고 후에 이런 행동들이 알려지며 노리스 윌리엄스 부자는 비극 속에서 빛을 발한 영웅이란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차가운 바닷속에서 6시간을 보낸 노리스 윌리엄스의 다리는 구조되었을 당시 완전히 동상에 걸려 있었습니다. 의사들은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진단을 내렸죠. 하지만 노리스 윌리엄스는 “저는 이 다리가 필요해요.” 하면서 절단을 거부했습니다.

노리스 윌리엄스의 결정은 옳았습니다. 타이타닉의 비극 이후 12주만에 테니스 코트로 돌아와 같은 타이타닉 생존자인 칼 베어를 상대로 경기를 치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런던 인디펜던트가 인용한 베어의 발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끔찍한 일이었지만, 카파티아호에서 생존자들과 보낸 4일은 훨씬 더 힘들고 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베어와 윌리엄스는 타이타닉호의 생존자 구조를 위해 보내졌던 이 카파티아호에서 처음 만났고, 두 사람의 시합에 대해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은 이렇게 서술합니다.

“기적적으로 생존한 지 12주 만에 윌리엄스와 베어는 인생에서 또 하나의 장을 함께 써내려갔습니다. 보스턴 외곽에서 열린 롱우드 챌린지 보울에서 서로를 상대로 치른 경기. 윌리엄스는 떠오르는 스타였고, 베어는 커리어의 막바지에 다다른 선수였습니다.”

그날 승리는 베어가 차지했지만, 노리스 윌리엄스는 타이타닉에서 꿈꿨던 우승이란 목표를 절대 잊지 않았습니다.

타이타닉 사고 이후 2년만에 노리스 윌리엄스는 자신의 첫 US 내셔널 개인전 우승을 차지했고, 1916년에도 또다시 우승을 거둡니다.

하지만, 같은 해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커리어를 잠시 멈추게 된 노리스 윌리엄스는 참전 용사로 프랑스 무공 십자 훈장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습니다.

전쟁을 겪은 이후에도 노리스 윌리엄스의 테니스에 대한 꿈은 그대로였습니다. 결국 타이타닉 참사 후 12년만인 1924 파리 올림픽에서 노리스 윌리엄스는 혼합 복식 금메달을 차지하며 마침내 올림픽 영광을 달성하게 됩니다.

악몽 속을 헤쳐나가며 살아와야 했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꿈 모두를 이뤄낸 것입니다.

코스모 더프 고든의 이야기

노리스 윌리엄스가 타이타닉 침몰 사고 이후 영웅으로 여겨졌던 것과는 달리, 타이타닉에 타고 있던 두 번째 올림피언, 더프 고든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달랐습니다.

타이타닉 승선 당시 노리스 윌리엄스는 막 떠오르기 시작한 스타였지만, 더프 고든은 이미 자신의 종목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간 인물이었습니다.

1906 아테네 올림픽에서 더프 고든은 펜싱 에페 남자 단체전 은메달을 따냈고, 타이타닉호에 탔을 당시에는 49세의 나이로 기사 작위까지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더프 고든도 아내인 패션 디자이너 마담 루치와 함께 1등석 승객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언론들은 사고 당시 더프 고든이 한 행동은 그런 지위를 가진 사람 답지 않았다는 보도를 냈습니다.

타이타닉이 침몰하는 상황에서 ‘여자와 아이들 먼저’라는 구조 원칙에 따르지 않고 더프 고든은 1번 구명 보트에 탔고, 40명 정원의 보트에는 더프 고든 외에 11명의 승객만이 탑승한 채로 출발했습니다.

더하여 침몰 현장으로 돌아가 사람들을 구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선원에게 뇌물을 줬다는 혐의도 받고 있으며, 이런 행동들 때문에 지금까지 ‘타이타닉의 비겁자’라고 알려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