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아이저: 메달, 미스터리 그리고 의족 선수 최초의 올림픽 출전

조지 아이저(중앙, 긴바지)는 1904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를 포함해 메달 6개를 획득했다.
조지 아이저(중앙, 긴바지)는 1904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를 포함해 메달 6개를 획득했다.

올림픽 역사는 수많은 챔피언과 신기록, 그리고 멋진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기묘한 일이나 재미있는 일화, 감동적인 이야기와 슬픈 기억도 놀라울 정도로 많이 존재하지요. 저희는 매주 과거의 올림픽 이야기를 발굴해 내는 시간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선사해 드리려 합니다. 이번주는:  1904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에서 한쪽 다리 대신 의족을 차고 출전해 금메달 세 개를 포함 여섯 개의 메달을 따낸 미국의 체조 선수, 조지 아이저의 이야기입니다. 

배경

올림픽 체조 선수 조지 아이저의 인생에는 수많은 미스터리가 존재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기차 사고로 왼쪽 다리의 거의 전부를 잃게 된 시기가 어린 시절의 정확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이 끔찍한 사고의 날짜와 상황에 대한 공식 기록은 여전히 애매모호한 상태이니까요. 하지만 이런 미스터리의 인물에게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습니다. 1904년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하계 올림픽에서 하룻동안 여섯 개의 메달을 따냈다는 사실.

1870년 8월 30일, 독일의 킬에서 태어난 게오르크 루드비히 프레드리히 율리우스 아이저는 14살 때 부모님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콜로라도주 덴버의 산악 지대에 잠시 머무르기도 했던 아이저 가족은 이후 독일 이민자이 많이 모이는 중서부의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어린 조지는 지역의 건설회사에서 장부 기록 담당 일자리를 얻습니다.

육체적으로 힘든 일과였지만 조지는 일과 후의 체조 활동에 흥미를 보였고, 특히 독일 이민자들에 의해 미국 전역에 전파된 터너 클럽 - 19세기 독일에 생겨난 ‘투른페라인’ (독일어로 ‘체조 연습’과 클럽’을 뜻하는 말)의 미국 버전 – 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20세기가 밝아왔을 무렵 세인트루이스 도시 내에만 11개의 터너 클럽이 생겨났고, 미국 전역에는 42,000명이 넘는 회원들과 316개의 클럽이 열려 있었습니다.

세인트루이스 포스트 디스패치는 1904 올림픽의 체조를 “터너 게임”이라고 불렀고, 여기서 더 나아가 “[1904 대회는] 두말할 여지 없이 터너 단체가 연 대회 중 가장 큰 대회로 남을 것이다”라는 말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아이저는 세인트루이스 남부 교외 지역의 콩코디아 투른페라인 클럽 소속이었습니다. 1904 올림픽에서 체조는 국가가 아닌 클럽팀 단위로 구분되었고, 아이저는 콩코디아 소속으로 출전했습니다.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에서 아이저가 착용한 의족은 무릎 위에 장비되었고 정교하게 깎은 발을 포함해 대부분 나무 재질로 되어있었습니다. 지금의 관점에서보면 1900년대의 의족은 아주 원시적일 것이라 생각되겠지만, 1904 올림픽이 열리기 40년 전에 종전된 남북전쟁 때문에 미국 내에는 큰 의족 시장이 있었고, 의족 디자인과 관련된 과학도 많이 발전해 있었습니다.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1904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근대 올림픽의 세 번째 대회에서 아이저는 서서히 컨디션을 끌어올렸고, 대회 초반(7월)에는 좋은 경기력을 보여 주지 못했지만 나중에 기회가 왔을 때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10월, 하룻동안 찾아온 그 기회에서 아이저는 종목별 결선을 통해 평행봉, 25피트 로프 오르기, 도마에서 금메달(1904 올림픽은 컵 모양의 트로피가 아닌 금, 은, 동메달이 수여된 최초의 올림픽.) 세 개를 따냅니다.

그날 아이저가 따낸 다른 금메달들은 상체의 힘만으로 – 혹은 상체의 힘 위주로 – 획득할 수 있는 종목이었지만, 도마는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의 도마 종목은 선수들이 도움닫기를 한 뒤 구름판의 도움 없이 멀리, 높이 뛰는 경기고, 선수들이 도약한 뒤 착지하는 것을 세 번 해야 했으니까요.

아이저는 안마와 4종목 개인종합에서 은메달 두 개를 추가했고, 철봉 동메달까지 차지하며 놀라운 하루를 마감했습니다. 그리고 아이저의 그날 활약으로 콩코디아 투른페라인 클럽은 1904 올림픽 단체전에서 4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아이저가 남긴 유산

아이저는 1908년(독일 프랑크푸르트)과 1909년(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열린 국제 체조대회에도 출전해 메달을 획득하는 것으로, 1904 올림픽에서 따낸 메달 6개는 괴상한 일정과 대회의 낮은 수준 때문에 쉽게 얻은 메달이었다는 사람들의 저평가를 일축해 버렸습니다..

아이저 본인과 체조계에는 안타깝게도 그의 인생은 길지 않았습니다. 수 년간 불확실한 소식들이 나돌고 세인트루이스에서 사라졌다는 설들이 돈 뒤에 결국 아이저의 사망 날짜는 1919년 3월 6일로 인정되었습니다. 하지만 1904 올림픽에서의 영웅적인 활약으로부터 15년 후, 4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추정될 뿐 그가 어떻게 사망했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아이저는 안타깝게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올림픽에서 의족을 달고 출전한 최초의 선수였던 아이저는 2008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나탈리 두 토이 같은 선수들을 위한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가 인생을 어떻게 마감했든 올림픽 기록은 조지 아이저와 그가 1904 올림픽에서 이뤄낸 업적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