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에서 베냉 최초의 올림픽 조정 선수까지: 프리벨 힌카티의 이야기

2016 세계 조정 월드컵 II 남자 싱글 스컬 예선 경기 중인 베냉의 프리벨 힌카티 (Photo by Philipp Schmidli/Getty Images)
2016 세계 조정 월드컵 II 남자 싱글 스컬 예선 경기 중인 베냉의 프리벨 힌카티 (Photo by Philipp Schmidli/Getty Images)

프리벨 힌카티는 관중으로 2008 베이징, 2012 런던, 2016 리우 올림픽에 참가했습니다. 특히 2016 리우 올림픽은 출전 자격 획득에 실패했지만 그래도 관중의 한 명으로 스탠드를 지켰죠. 그러나, 힌카티는 새벽 5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이어지는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올림픽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고, 결국 도쿄 2020 출전 자격 획득에 성공합니다. 올림픽의 꿈 그 자체를 상징하는 힌카티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내년 도쿄 2020에서 베냉 최초의 올림픽 조정 선수로 기록될 프리벨 힌카티.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은 순간은 2012 런던 올림픽 육상 여자 400m 결승전이었습니다.

물론, 그날 밤 힌카티가 런던 올림픽에서 뛰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대신 힌카티는 올림픽 스타디움의 관중석에서 누나 페르넬과 함께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죠. 두 사람이 올림픽 관중석에 앉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지만, 그날 밤 힌카티는 뭔가 다른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누나에게 “나도 이거 하고 싶어” 라고 말했죠.

그렇게 올림픽을 향한 힌카티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연히 31살의 힌카티는 올림픽에 도전할 종목이 육상은 아니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올림픽에서 자신이 대표할 나라의 이름은 불확실했죠. 힌카티는 프랑스의 캉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모두 베냉 사람이라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힌카티의 누나가 되물었습니다. “그래, 그런데 베냉이야 프랑스야?” 

힌카티는 그 당시의 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더 큰 일이 될 것 같아서 베냉을 생각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조정을 얼마나 잘 하느냐 한 가지에만 달려 있겠지만 베냉에서는 완전히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하니까요. 협회도, 자금도, 보트도, 아무것도 없이. 게다가 조정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베냉을 택한 겁니다.”

올림픽의 맛을 느끼다

힌카티는 지난 10월, 튀니지에서 열렸던 아프리카 예선에서 결승전 5위를 기록하며 도쿄행 티켓을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힌카티는 관중으로서가 아니라 올림픽 선수로서 다음 올림픽에 출전한다는 것을 실감했죠.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 실현된 것입니다.

모든 올림피언들은 자신만의 올림픽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힌카티의 이야기는 특별합니다. 누나와 함께 꾸준히 올림픽 관전을 다녔고, 고향에서의 한 프로젝트를 통해 2004 아테네 올림픽에 갈 기회까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어렸기 때문에 아테네행 티켓은 좀 더 나이든 아이에게 양보했었죠.

힌카티는 모든 올림픽들이 고유의 특색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베이징 올림픽의 관중들은 엄청났습니다. 두 시간 전에 도착했을 때는 조용했지만, 어느 시점이 되자 엄청난 인파가 몰려왔어요.”

“런던에서는 올림픽 스타디움이 문자 그대로 떨렸습니다. 경기의 긴장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어요. 리우에서는 경량급 더블스컬 결승이 기억납니다. 프랑스의 피에르 우인과 제레미 아주 조가 금메달을 차지했던 경기요. 분위기가 정말 좋았습니다.”

캉 조정 클럽에서 훈련을 마친 프리벨 힌카티
캉 조정 클럽에서 훈련을 마친 프리벨 힌카티
© Guillaume Marie - MGSP

베냉에 조정을 알리다

힌카티는 베냉 조정 대표로 2016 리우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4년동안 노력을 쏟았습니다. 당연히 “노력을 쏟았다”는 말은 훈련만 열심히 했다는 뜻이 아니죠. 훈련은 올림픽으로 가는 힌카티의 여정에서 그저 한 부분에 불과했습니다. 토고와 나이지리아 사이에 끼어 있는 베냉에는 2012년 당시 조정 협회도 없었으니까요.

사실, 그 당시에는 베냉에 ‘조정’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힌카티는 지역 당국 및 국제 조정 연맹과 협력해 베냉에 조정 연맹을 만들고, 조정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한 일부터 해야 했습니다.

“이제는 협회가 존재하고, 운영도 되고 있습니다. 베냉의 모든 사람들이 조정이 뭔지 알아요. 이제 베냉에는 약 다섯 개 정도의 조정 클럽과 70명 가까운 선수들이 있습니다.”

“올림픽 출전을 확정한 다음에는 아프리카 조정 선수권에 출전하는 기회까지 얻었습니다. 마후틴 로맹 아크포와 더블스컬로요. 우리는 4위를 기록했습니다.”

약 10년 전만 해도 조정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로서는 상당히 인상적인 성과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힌카티의 목표 중 첫 번째 장은 달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실패

이제 목표의 두 번째 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힌카티는 훈련과 장비, 이동 비용과 물리 치료사 고용을 위한 자금을 찾아야 했죠. 프랑스 캉의 요트 클럽 출신인 힌카티는 프랑스 스폰서들을 찾을 수 없어서 크라우드펀딩을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에 살고 훈련하지만 프랑스 대표팀이 아니라 베냉 선수입니다. 프랑스에서 지원을 찾기가 힘들고 자금 마련을 위해 제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것 자체가 어렵죠. 그래서 다른 접근법을 활용해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크라우드펀딩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내 노력뿐만 아니라 내 꿈을 지원해 주는 일이란 것을 보여주려 했어요. 말하자면…다른 종류의 스폰서십이죠.”

그러나, 이런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힌카티는 2016 리우 올림픽 출전 자격을 얻지 못했고, 그것은 선수 본인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정말 많은 노력을 들였고, 모든 것을 쏟아부었어요.

탈락은 정말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올림픽은 내 꿈이었어요.

프랑스 캉 조정 클럽에서 보트를 옮기고 있는 프리벨 힌카티
프랑스 캉 조정 클럽에서 보트를 옮기고 있는 프리벨 힌카티
© Guillaume Marie - MGSP

인내의 시간

그러나, 힌카티는 절대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실망감을 이겨내기 위해 얼마간의 시간을 가진 후 결국 보트 위로 돌아왔죠.

“많은 친구들과 가족들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해줬습니다. 한 번 더 해보라고요. 안 그러면 제가 절대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내가 …’라는 말을 항상 달고 살게 뻔하다면서요.”

힌카티의 코치이자 오클라호마 시티에 있는 미국 조정 경기력 향상 센터의 헤드 코치인 레일리 댐피어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코치는 제가 이제 코스 위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뭘 해야 할 지 알게 되었을 것이고, 경험이 쌓이며 강해졌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016 리우 올림픽 조정 경기에 관중의 한 명으로 참가했던 것도 실제로 힌카티의 도쿄 올림픽 출전 자격 획득에 도움을 줬습니다. 그 날, 자기 자신과 한 가지 약속을 했으니까요.

“’그래, 지금은 보고만 있지만, 4년 뒤 도쿄에서는 나도 저기, 경기장에 나가 있을거야.’ 그 다짐으로 굉장한 의욕이 솟아올랐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힌카티를 목표에 집중하게 했던 한 가지는 바로...

“올림픽의 꿈. 네, 올림픽의 꿈이요.”

출전 자격을 따냈던 경기에서 저는 결승선을 지나서도 계속 노를 저었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링까지 계속 노를 저었어요

혹시 모르니까.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요.

두 번째 시도에서의 성공

4년 후, 힌카티는 도쿄 2020 출전 자격을 획득하게 됩니다. 자신의 꿈을 이뤄냈다는 느낌이 어땠을지 다들 상상이 가시겠죠…그러나, 사실 힌카티에게 그 순간을 즐길 여유는 없었습니다.

“출전권을 따냈던 경기에서 저는 결승선을 지나서도 계속해서 노를 저었습니다. 2, 3번째 링까지 노를 저어갔어요. 혹시 모르니까. 확실히 하고 싶었습니다. 장내 아나운서가 ‘선수들은 모두 멈춰 주세요’라고 방송할 때까지 노를 저었어요.”

목표의 두 번째 장 역시 완료되었습니다. 드디어 꿈이 이뤄진 것입니다.

힌카티는 그제서야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의지만 있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증명해 보였으니까요.

“프랑스 조정 클럽의 많은 사람들이 저를 보고 미쳤다고 했습니다. 올림픽 출전에 대해 상상을 하거나 꿈을 꾸는 것만으로요. 출전 자격을 획득했을 때 그 모든 일이 기억났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난 미치지도 않았고 거짓말쟁이도 아니야.’”

출전을 확정한 힌카티는 두 번째 크라우드펀딩을 진행했고, 펀딩은 또다시 성공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힌카티를 거짓말쟁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생겨난 이유도 바로 이 크라우드펀딩 때문이었죠.

“일부 사람들은 내가 거짓말로 돈을 모아서 챙기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국제 무대에 베냉을 알리다

힌카티는 베냉 최초로 올림픽 출전을 확정한 조정 선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베냉을 세계 조정계에 알렸고, 조정 종목 내에서 흑인 선수의 대표자 역할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본인도 정말 자랑스럽게 여기는 일들이죠.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계속 여기에 대해 물어봅니다. 특히 흑인과 다양성에 대한 관심이 커진 지금 같은 시기는 더 그래요.”

“월드컵과 세계 선수권에서 저는 몇 안되는 흑인 선수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저를 제외하면 아마 쿠바 한 명, 토고 한 명 정도가 있었을 거예요. 선수 등록을 할 때 국적을 물어보면 저는 ‘베냉’이라고 답합니다. 그러면 꼭 이렇게 물어요. ‘나라 이름 맞아요?’ 좀 웃겼죠.”

“그런데 2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이제 사람들이 저를 먼저 알아보고 자랑스럽게 외칩니다. ‘아, 베냉 왔네요!’ 다들 이제는 제 보트와 노에 붙여진 베냉 국기도 알아봐요.

새벽 5시부터 저녁 8시까지

올림픽을 향한 힌카티의 퀘스트에서 세 번째 장은 현재 진행 중입니다. 도쿄 2020에서 베냉을 대표해 최고의 실력을 보여 줄 수 있도록 훈련에 매진하고 있죠. 주 목표는 올림픽 출전이었지만, 올림픽 조정 경기가 열리게 될 우미노모리 수상경기장의 본 무대에서도 힌카티가 세울 수 있는 목표는 많습니다.

“20위 안에 들어간다면 만족할 것 같습니다. 대회를 즐기고 최선을 다할 생각이에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힌카티는 직업인 캉 시청의 컴퓨터 엔지니어로 일할 때 말고는 모든 자유 시간을 조정에 쏟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근직이기 때문에 자유 시간을 찾는 것이 종종 어려울 때도 있죠. 하지만 힌카티 본인이 증명해 낸 것처럼 ‘어렵다’는 ‘불가능하다’가 아닙니다.

힌카티의 일상은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어지러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올림픽을 꿈꾼다면 해 볼 수 밖에 없죠.

“오전5시7분에 일어납니다. 알람은 4시 50분이나 5시에 맞춰져 있고 다시 알림 기능을 사용해서 조금 더 자요. 그래도 5시 7분은 넘길 수 없습니다. 넘겨버리면 일과를 망치게 되니까요. 6시에는 이미 물 위에 있어야 합니다. 8시까지 노를 저어야죠. 그리고 9시까지는 사무실에 나가야 합니다. 정오까지 일하고 점심시간에는 운동을 합니다. 그리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6시까지 일을 마치고 6시 30분부터 8시까지는 또 훈련을 합니다. 이후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10시-11시 사이에 잠자리에 듭니다. 주중에는 매일 이렇게 살아요.” 

토요일에는 두 번이나 세 번의 훈련 세션을 가지고, 일요일에도 한 번의 훈련 세션은 진행합니다.

이런 바쁜 일정으로 때로는 힘들 때도 있지만, 힌카티는 핸드폰 케이스에 새겨 놓은 올림픽의 꿈을 보며 그 모든 고난들을 이겨낸다고 합니다.

“훈련하러 가야 되는데 침대에서 못 일어나고 있을 때, ‘너무 피곤해, 날씨가 안좋아’ 등등 온갖 핑계와 쉬어야 될 이유들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저는 오늘은 내게 있어서 더 나아질 기회라는 점을 생각합니다. 침대 속에서는 더 나아질 수 없다는 것도요. 그러면 곧바로 일어납니다.”

“올림픽에서 경쟁하기 위해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최고가 되어야 합니다.”

프리벨 힌카티의 핸드폰 케이스에 새겨진 매일이 나의 날이다라는 2020 도쿄 올림픽 로고.
프리벨 힌카티의 핸드폰 케이스에 새겨진 "매일이 나의 날이다"라는 2020 도쿄 올림픽 로고.
Courtesy of Privel Hinka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