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자토펙: 장거리 천재의 별난 기록

1948년 8월 2일, 1948 런던 올림픽 5,000m 경기중인 에밀 자토펙. (Photo by Hulton Archive/Getty Images)
1948년 8월 2일, 1948 런던 올림픽 5,000m 경기중인 에밀 자토펙. (Photo by Hulton Archive/Getty Images)

올림픽 역사는 수많은 챔피언과 신기록, 그리고 멋진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기묘한 일이나 재미있는 일화, 감동적인 이야기와 슬픈 기억도 놀라울 정도로 많이 존재하죠. 저희는 매주 과거의 올림픽 이야기를 발굴해 내는 시간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선사해 드리려 합니다. 이번주는: 전설적인 천재, 에밀 자토펙입니다.

배경

에밀 자토펙은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 앞서 이미 육상계에서 가장 빛나는 스타 중 한 명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를 대표해 런던 1948에도 출전했던 자토펙은 겨우 두 달 전에 10,000m를 처음 접했음에도 올림픽 기록을 경신하며 10,000m 금메달을 차지해 전세계를 놀라게 한 바 있었습니다. 당시 자토펙보다 한 바퀴나 뒤처졌던 선수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계시원들이 다른 선수들의 기록을 전부 남기지 못해 상위 11명까지만 순위가 등록됐다는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며칠 뒤 자토펙은 5,000m에서 은메달을 추가했습니다. 자토펙은 마지막 100m에서 엄청난 질주를 선보이며 벨기에의 가스통 레프를 바짝 추격했지만, 단 1m 차이로 결국 레프가 금메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디언>지에서는 자토펙이 “그 자체만으로도 트랙에서 불멸의 존재 중 하나로 남게 해 줄 경기”를 펼쳤다고 보도했습니다.

자토펙의 승리가 당시 육상계에 충격을 던졌을지 모르지만, 이는 보두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훈련의 결과였습니다. 체력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무거운 군화를 신고 밤낮으로 달리고, 기절할 때까지 숨을 참거나,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제자리달리기를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하루에 100번씩 전속력으로 400m를 질주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국제 대회가 요구하는 까다로운 수준에 맞출 수 있도록 몸 상태를 갈고 닦기 위해서였습니다.

“힘든 조건에서 훈련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그 차이가 대회에서 엄청난 안도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결선

헬싱키 1952의 개막이 가까워졌을 무렵 자토펙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각종 장거리 종목을 넘나들며 69연승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전염병으로 인해 올림픽에 참가하지 말라는 의사들의 권고를 받아 대회 준비가 불투명해졌던 때도 있었지만, 자토펙의 역사적인 순간을 빼앗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자토펙의 올림픽 첫 레이스는 10,000m로, 4년 전 금메달을 차지했던 바로 그 종목이었습니다. 자토펙은 또다시 압도적인 경기를 펼치며 손쉽게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이어서 5,000m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해 런던에서 한 걸음 차이로 놓쳤던 장거리 2관왕을 달성했습니다.

그러나 자토펙의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긴 것은 그 다음 레이스였습니다.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후로도 아직까지 아무도 따라하지 못한 업적을 이뤄냈던 것입니다.

자토펙은 그 전까지 한 번도 뛰어본 적이 없었던 마라톤 종목에 출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세계기록 보유자이자 챔피언, 영국의 짐 피터스에게 맞서게 된 자토펙은 틀림없는 언더독으로서 레이스를 시작했습니다.

자토펙은 경기 중에도 수다스럽기로 유명한 선수였습니다. 마라톤 레이스에서도 경기가 시작되고 한 시간 남짓 흘렀을 무렵 피터스에게 경기 페이스가 괜찮은지 물어보았죠. 그러자 피터스는 자토펙에게 겁이라도 주려는 듯 사실 속도감이 너무 떨어지는 느낌이라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피터스의 계략은 예상과 다른 효과를 낳았습니다. 피터스의 대답을 들은 자토펙이 갑자기 페이스를 높여 달려나갔고, 뒤쫓아오는 선수들과의 차이를 2분으로 벌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레이스 동안 자토펙은 차를 타고 경기를 취재하던 사진사들과 유쾌하게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마라톤 올림픽 신기록을 수립하고 3개의 금메달이라는 사상 초유의 업적을 달성하며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 <가디언>의 표현에 따르면 자토펙은 “마치 상쾌하게 산책을 하고 온 사람 같았다”고 합니다.

한 영국 기자는 5,000m, 10,000m, 그리고 마라톤에서까지 금메달을 딴 자토펙의 레이스를 두고 “육상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라고 칭했습니다. 그 이후로 트레블 달성에 근접한 선수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이후

헬싱키에서 영예로운 승리 이후 4년, ‘장거리의 왕’ 자토펙은 다시 한 번 올림픽을 향해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멜버른 1956을 준비하며 자토펙은 평소 스타일대로 훈련을 진행했고, 그 중에는 아내를 등에 업고 크로스컨트리를 하는 훈련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탈장 증세를 보이게 됐고, 결국 올림픽이 시작됐을 때 마라톤에서 6위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내는 데 그치고 말았습니다.

자토펙은 멜버른 올림픽이 끝나고 1년 뒤에 현역에서 은퇴했습니다.

1968년 초, 당시 소련의 영향력 하에 있던 체코슬로바키아는 이후 ‘프라하의 봄’으로 알려지게 된 사건으로 한창 들끓고 있었습니다. 당시 자토펙은 민주화 운동 진영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무력 진압으로 프라하의 봄이 끝나면서 자토펙도 희생양이 되어 청소부가 되었다가 끝내는 우라늄 광산에서 노동형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 자토펙이 일흔여덟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자 불변의 전설로 추앙받으며 올림픽에서의 업적도 전설적인 기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자토펙과 같은 선수를 앞으로 다시 볼 수 있을지,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별난 기록을 남긴 체코슬로바키아의 ‘장거리 천재’는 분명히 앞으로도 기억될 것입니다.

자토펙의 센세이셔널한 금메달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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